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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30 오리아나의 구체(Faker)

오리아나의 구체(Orianna's Ball)

 

 

 

 

구체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어둑한 방안에 울려 퍼지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기이했다. 모로 누운 채 자고 있던 상혁은 낯선 소리에 반쯤 눈을 떴다.

 

하얀 벽 대신에 황동색 금속이 보였다. 상혁의 눈이 커졌다. 상혁의 몸만한 금속 구체가 방 한가운데에 둥둥 떠있었다. 상황 파악이 된 순간 상혁은 솟구치듯 일어났다.

 

구체가 상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상혁은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작정 몸을 뒤로 뺐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헤드가 등에 턱 부딪쳤다. 이부자락만 발끝에 밀려날 뿐이었다.

 

구체는 순식간에 상혁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상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구체 안에서 들려오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섬뜩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혁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구체의 한켠에 작게 써 있는 영단어가 보였다.

 

Orianna Reveck

 

익숙한 이름을 보자 반쯤 날아가 있던 상혁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오리아나? 그러고보니 이 공...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역시 자신이 하는 게임이었다.

 

그게... 왜 여기 있어? 그건 게임이잖아. 하지만 생각하고 보니 아무리 봐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오리아나가 끌고 다니는 무기인 기계구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또 하나의 챔피언처럼 다뤘던 그 구체 말이다.

 

상혁은 슬금슬금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저것이 오리아나의 구체든 뭐든, 일단은 무서웠다. 중력을 무시하는 물건이 갑자기 나타난 거잖아! 어떻게든 구체로부터 벗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흘끔 쳐다본 방문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어보였다. 숙소생활만 육 년을 했는데. 한 번도 방이 넓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건만.

 

상혁은 눈치를 살피며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방문을 향해 무작정 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을 주고 한 두어 발짝 떼기 무섭게 상혁은 제 발에 꼬여 자빠져버렸다. 공포로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방바닥에 형편없이 엎어진 상혁의 곁으로 재빨리 이동한 구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만히 횡으로 자전할 뿐이었다.

 

끄응. 겨우 일어나 앉은 상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혁이 쳐다보자 구체는 회전을 멈췄다. 구체의 중앙에 박혀있는 푸른 수정이 상혁을 향했고,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상혁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정말 그냥 떠있기만 했다. 방밖에서 팀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인가. 왜 아침부터 뛰고 지랄일까. 어쨌든 새로운 팀원들은 아마 상혁이 소리치지 않는 이상 상혁의 방에 먼저 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든 상혁은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문을 열고 팀원들과 이 구체가 서로 마주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구체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고 해서 팀원들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 원하는 거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상혁에게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소리를 내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떨리는 목소리에 구체는 아까처럼 오리아나 레벡의 이름이 적힌 면을 상혁에게로 향했다.

 

[ 사용설명를 읽으시ㅔㅆ? ]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기계로 변조된 듯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상혁은 화들짝 놀랐다. 노이즈 때문에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사용설명서를 읽겠느냐고 묻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뭘 어째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상혁은 작게 예, 하고 대답했다.

 

[ ...터치주세요. ]

 

상혁은 소심하게 검지손가락 끝을 구체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주변이 온통 깜깜해졌다. 기겁하며 손가락을 떼자 상혁의 시야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구체는 다시 노이즈와 함께 터치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방문 너머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동하 왜 뜬금없이 랩하고 있는데. , 상혁은 한숨 쉬며 구체에 손을 올려놨다.

 

시야가 깜깜해진 가운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구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상혁은 설명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노이즈가 너무 심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 사용설명를 읽으시ㅔㅆ? ]

 

설명이 끝나자 상혁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고, 구체도 처음으로 돌아갔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잠시 멍하니 있던 상혁은 설명의 진위여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적어놔야 한다는 생각으로 펜과 수첩을 서둘러 가져왔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설명을 적기 시작했다.

 

-오리아나 레벡이 만든 물건

-공허... 뭐라고 함. 잘 안 들림

-정해진 날과 시간에 구체 아래 버튼 누를 것(그런데 정해진 날, 시간이 안 들렸음...)

-정해진 날까지 구체가 나를 자동으로 보호함(어떻게? 충격파?)

-내가 명령해서 조종하는 것도 가능함. 연습 필요.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은 불가능. 웬만하면 자동모드로 둘 것을 권장함

-공기정화 기능이 있음

 

공기정화라는 단어를 끄적이며 상혁은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파일이 손상이라도 됐는지 설명의 절반 이상은 날아가버린 거 같고 말이다. 상혁은 평온하게 제 곁에 떠있는 구체를 돌아봤다. 둥둥 떠다니는 공기청정기... 아니, 요즘 공기청정기는 저렇게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날 것이었다.

 

상혁은 수첩을 덮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가 문젠데. 당장 저 문밖을 나가면 팀원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그리고... 오늘 경기도 있잖아...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상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혁이 방문을 열고 나가니 구체도 자연히 뒤따라왔다. 명령해도 멀리 떨어뜨려놓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말 그대로 오리아나처럼 여기로 가, 저기로 가, 공격해, 이런 것만 가능하다는 거겠지.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면 자동으로 돌아오고. 상혁은 다 내려놓고 터벅터벅 숙소 거실로 걸어나갔다.

 

잠시 후, 숙소에 여러 남정네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운석이 떨어지지 않나, 오리아나 공이 실제로 나타나지 않나...”

후자가 훨씬 이상한 건 확실함.”

하지만 중국이면 옆동네잖아.”

얘도 옆에 있긴 매 하난데? 심지어 바로 옆.”

 

팀원들의 두서없는 대화를 들으며 상혁은 피곤한 눈을 떴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상혁은 평소처럼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커다란 구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끌어안고 있으니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떠있어서 무게는 안 나간다 해도 부피는 나가니까. 그리고 이걸 경기장 안에 풀어놓으면 대체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이 심히 되는 것도 있었다. 케스파컵 같은 거 대체 왜 하는데. 맨날 퍼즈나 걸리는 노답리그. 워낙 답 없는 상황이라 그런 생각까지 드는 상혁이었다.

 

팀원들은 몰라도 김정균 감독은 구체를 보자마자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상혁이 말렸다. 지금 구체 제대로 컨트롤 못하는데 얘가 멋대로 경찰들한테 충격파라도 날리면 진짜 다 망한다고. 오리아나 충격파는... 무섭지 그래. 윙윙거리며 상혁의 주변을 맴도는 구체를 보며 김정균 감독은 납득했다.

 

그리고 상혁은 경기장에 갈 때까지 구체를 제 뜻대로 움직이려고 시도해봤다. 그러나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내가 명령하면 듣는다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저기로 가라고 손가락질하는 상혁의 모습이 볼만했다. 마우스 움직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니 구체 조종이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뭐 할 말 있어?”

 

팀원들이 안 쳐다볼 수가 없긴 한데, 잠도 못 자고 휴대폰으로 오리아나의 배경 스토리를 찾아 읽고 있던 상혁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민승이 남다른 눈빛을 쏘아 보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저어어... 형 저 그거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돼요?”

 

반짝거리는 민승의 눈빛을 보고 상혁은 기억해냈다. 저 눈빛, 쟤가 좋아하는 애니 캐릭터 볼 때 그 눈빛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대체 뭐임? 이건 투디도 아니고 예쁘고 귀엽지도 않은데?

 

뭔 일 생겨도 난 책임 안 져.”

 

상혁은 구체를 살짝 놓으며 말했다. 구체는 상혁의 무릎에서 떨어져 위로 살짝 떠올랐다. 말 그대로 두둥실 하는 느낌이었다.

 

오리아나의 구체가 투디적인 감성을 꽤나 자극하는 물건임을 상혁이 알 리 없었다. 주인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무기라니.

 

구체를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만 먹었던 상혁과 달리 민승은 설레어하며 손을 가져다댔다. 상혁을 비롯한 나머지 팀원들은 다들 조금 긴장해서 민승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되게... 오뚜기 느낌? 인데요?”

 

툭 밀자 상혁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구체는 기우뚱하며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툭툭. 민승이 몇 번 더 구체를 쳤고 구체는 기울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옆에 앉아있는 진성은 민승의 말에 웃더니 덩달아 구체를 툭 건드려봤다. 그리고 오오 하며 감탄했다.

 

형 얘 얌전한데?”

내가 안전해서 그런 거 같은데.”

 

이 구체가 생각보다 똑똑할지도 모르겠다고 상혁은 생각했다. 우리 팀원들을 구분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서 영상 찍으려 드는 동하를 자연스럽게 제지했다.

 

누구 맘대로 찍음.”

 

어차피 경기장 가면 모든 사람들이 보겠지만. 동하의 폰을 밀어서 치워버리고 구체를 끌어안으며 상혁은 한숨을 삼켰다. 관심도 백 퍼센트겠네.

 

차 안 공기가 상쾌하다. 공기청정 기능도 있다더니.”

 

걱정 가득한 머릿속으로 멍하니 있자니 동하가 눈치를 살피다 농담조로 한마디 했다. 얘한테 트롤 소리 들었을 때도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지금은 좀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상혁은 생각했다. 근데 정말로 공기는 좋네.

 

그러면서 아까 읽고 있던 오리아나의 배경 스토리를 마저 읽었다. 원래 게임 스토리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상혁이었다.

 

그는 원래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어느 도시의 유독가스 누출 사고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유독가스로 말미암아 그의 몸은 계속 망가져갔고, 망가져가는 부위를 기계로 바꿔나갔다고. 맨 마지막으로 아픈 아버지에게 자신의 심장을 이식한 후, 완전한 기계인간이 된 오리아나는 집을 영원히 떠났다.

 

오리아나 스스로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슬프고 숙연해지는 이야기였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상혁은 공기정화 기능에 대해서도 헛웃음을 지은 게 괜히 미안해졌다. 폐가 망가지는 사고를 겪은 오리아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기능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삼성역을 지나 경기장에 도착했다. 선수들이 차례차례 내리고 맨 마지막으로 상혁이 구체를 끌어안은 채 내렸다. 날선 추위에 상혁의 양손이 패딩 주머니로 들어가자 구체는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올라서 상혁의 뒤를 따랐다.

 

경기장 구조상 선수 및 관계자들만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없기에, 경기장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팬들은 상혁의 등 뒤에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있는 구체를 볼 수 있었다. 경기장도 왜 하필이면 이런 경기장이라서... 팬들의 웅성거림과 휴대폰 카메라 소리가 참 크게도 들렸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시간이 마냥 길게만 느껴지는 상혁이었다.

 

스태프며 기자, 타팀 선수며 여타 관계자들도 다들 놀라서 상혁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저게 대체 뭐냐고 물었다. 설명이라고 해봤자 오리아나 구체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리아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상혁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구체가 아니었으면 미쳤다고 할 텐데, 그런데 구체가 실제로 있네?

 

이거 사진 찍어도 돼?”

으음... 어차피 다 볼 수 있으니까요...”

 

어쩐지 동하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상혁은 말했다. 역시 그냥 찍게 해줄 걸 그랬나. 상혁의 허락을 받은 기자는 구체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 타이틀은 오리아나 그 자체, 뭐 이런 게 될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경기가 코앞인데도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 가운데 상혁은 자포자기심정으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 오리아나 공은 저거보다 더 크지 않아? 챔프 몸보다 더 크지? 구체가 대기실 문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기는 했다. 뭐 이런 말들이 오고가는 것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침착하자 이상혁. 좀 있으면 경기야. 저 구체에 더 이상 신경 쓰면 안 돼.

 

그렇게 경기시간이 다가왔다. 상혁이 대기실에서 나가자 구체도 따라갔다. 경기장 내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그리고 휴대폰 카메라 렌즈도 결국 상혁은 경기부스가 있는 무대로 가다말고 우뚝 멈춰서 돌아섰다. 구체도 멈췄다.

 

,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당연히 구체가 뭐라 대답할 리는 없다. 상혁이 다시 돌아서서 무대로 걸어가니 구체가 또 따라왔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워낙 잘 들리는지라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상혁은 또다시 멈춰섰다.

 

여기 있으라니까? 나 경기해야 돼. 여기 있어도 나 안 죽는다고. 여기 있다가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날아오든가. 너 빠르잖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상혁이 오리아나의 구체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상혁은 어린 애 달래듯 구체를 어르고 달랬다.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이 통했는지 구체는 더 이상 상혁을 따라가지 않고 경기장 뒤편, 통로 근처에서 대기했다. 상혁은 아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누가 함부로 건드리지만 않으면야...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조연출 하나가 구체를 치워보겠다고 다가가는 것이 상혁의 눈에 들어왔다. 경기석에 앉아서 한창 경기 준비 중이던 상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디님 이거 죽어도 안 움직이는데요!”

 

만지지 말라고 소리치려던 상혁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허공에 못 박힌 마냥 죽어도 움직이지 않는 구체였다. 둥실둥실하던 움직임도 없어져서는 스태프들이 온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랑 거리를 더 벌리려고 해서 저렇게 버티는 거구나. 접근하는 사람들 날려버리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매니저가 재빨리 달려가서 일단은 구체를 그대로 놔둬달라고 부탁했다. 경기장이 워낙 좁다보니 상혁이 보기에도 통행에 엄청 방해되기는 했다. 매니저와 스태프가 옥신각신 하는 모습과 팬들이 구체를 피해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며 상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경기장에 불청객을 들여놓은 채, 우여곡절 끝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에 멘탈이 흔들렸을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상혁은 게임을 잘 이끌어나갔다. 팬들도 곧 구체의 존재를 잊고 모두 경기에 집중했다.

 

일이 벌어진 것은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넥서스가 날아감과 거의 동시에, 경기장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누가 신고했어? 상혁은 깜짝 놀라며 바로 헤드셋을 벗고 일어섰다. 경찰들도 어딜 봐도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 구체를 보고 놀라기는 매 하나였다. 폭탄은 아니겠지 중얼거리며 경찰들이 이리저리 구체를 만져봤다.

 

이거 누구 겁니까?”

 

경찰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걸어오는 상혁에게로 향했다. 상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일단... 일단은 내 거 맞지? 경찰은 자연스럽게 구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상혁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게 눈앞에 둥둥 떠있었다고. 그게 사실인데 뭘 어떻게 말하겠는가. 말하면서도 경찰들이 안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이름도 써있으면 이거 분실물 아닌가, 하고 경찰들은 서로 중얼거렸다.

 

일단 이거 저희가 좀 가져갈게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 가져가실 텐데요...”

 

상혁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나만 따라다닌다고 분명 말했는데... 역시 흘려들었네. 예상대로, 경찰들도 조연출처럼 구체를 움직여보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이거... 이러면 저희랑 동행을 해주셔야겠는데요.”

? 아니 저도 할 일이 있는데요?”

 

이어진 경찰의 말에 상혁은 당황했다. 오늘 경기 져서 한동안 경기는 없겠지만 그래도 연습도 해야 하고... 구체를 경찰서든 어디로든 옮길 방법이라면 상혁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긴 하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변호사를 불러야 하나. 잠깐만요, 하면서 상혁은 휴대폰에서 아버지의 번호를 찾았다. 근처에 있던 김정균 감독도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사무국과 통화하는 듯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상혁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구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구체의 기계 소리가 커진 것을 상혁은 알아차렸다. 푸른 수정이 반짝 빛났다.

 

...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설마. 긴가민가하며 상혁이 경찰들에게 경고함과 동시에 구체가 경찰을 확 떠밀어버렸다. 경기장에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혁은 인간의 몸이 저렇게 가볍게 날아갈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이어 구체는 다른 경찰들도 무자비하게 쳐내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혁이 손 쓸 새도 없었다. 미처 나가지 못하고 경기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우왕좌왕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장 밖으로 향하는 통로가 구체의 이동범위 안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통로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운 나쁘게 경기장 안쪽으로 몰린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구석으로 숨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혁을 중심으로 구체는 크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좁은 경기장 여기저기에 쾅쾅 부딪쳤다. 의자며 여러 물건들이 날아갔다. 경기장 안쪽에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울음소리도 들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체와 충돌한 벽이 크게 움푹 패였고 구체는 바로 방향을 틀어 지미집 카메라도 박살내버렸다. 구체를 컨트롤할 엄두도 못 내던 상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만 좀 해!!!!!”

 

팔을 옆으로 뻗어 사람들 앞을 막아서며 상혁은 소리 질렀다. 구체는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 푸른 수정에 얼굴이 비치는 순간, 상혁에게 안도감과 절망이 같이 밀려왔다. 경기장은 박살나고 경찰들은 뻗어있고 그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봤고...

 

나를 지켜준다더니 이게 뭐냐고! 이러면 경찰서 끌려가도 할 말이 없잖아 이... 이 멍청아아아!”

 

 

 

 

차라리 내 거 아니라고 잡아뗄 걸.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상혁은 얌전히 경찰서로 향했다. 추가지원 온 경찰들도 엉망진창이 된 경기장 풍경과,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는 동료들과, 경기장 한가운데에 떠있는 구체를 보며 할 말을 잃었더란다. 내가 한 건 아니지만 내 소유물이 이런 사고를 치면 대체 죄목이 뭐가 되는 거지? 방조죄? 과실치상죄? 심지어 애완견이 문 것도 아니고 정체불명의 기계야. 아니 그것보다 이걸 정말 내 거라고 할 수 있어? 얘가 일방적으로 나타나서 따라다니는 건데!

 

이대로 내 커리어는 끝인가.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잔뜩 겁먹고 있었으나 상혁이 경찰서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변호사가 도착했던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건 참 중요하구나 상혁은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연습실에 돌아오니 다음날이었다. 자정을 넘겼다는 말이다. 조사를 안 할 수는 없고 하지만 구체를 상혁으로부터 떼어낼 방법이 현재로서는 전무하기에, 경찰은 아침에 숙소로 찾아와 구체를 다시 살피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해졌으나 상혁이 간 곳은 어쨌든 숙소가 아니라 연습실이었다.

 

형 괜찮아요? 그냥 숙소 가서 쉬는 게 안 나아요?”

 

상혁이 연습실에 들어서자 민승이 가장 먼저 물었다. 상혁은 말없이 자기 자리로 가서 장비가방을 던져놨다. 상혁을 따라온 구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연습실 중앙에서 빙그르르 자전했다.

 

우리한테는 괜찮은데 이상하네.”

 

이렇게 얌전한데. 괜히 건드려서 그런 거 아냐. 구체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진성이 중얼거렸다. 심지어 손으로 슬쩍 밀기도 했으나 구체는 경기장 갈 때처럼 약간 기울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워낙 늦은 새벽이라서 다른 팀원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사실 상혁도 연습실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기에, 어제 경기에서 패배한 것이 이제야 상혁에게 와닿았던 것이다. 그래서 연습이나 하자고 온 건데.

 

시간도 늦었으니 솔랭 몇 판만 하자. 구체를 등 뒤에 두고 상혁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어디서 키보드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하도 있어?”

 

누구한테 물은 건 아니고 혼자 중얼거리며 상혁은 고개를 돌렸다. 끔찍한 게임이었던지 머리카락을 쥐뜯고 있는 동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체와 놀던 진성은 큐가 잡히자 후다닥 제 자리로 달려갔다.

 

형 별똥별 떨어지는 거 오늘이래요.”

 

민승이 갑자기 하는 말에 상혁은 고개를 갸웃 했다.

 

아까 동하 형이 말한 거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시간 보니까 이제 떨어질 때 다 된 거 같은데...”

좋아! 룬 유성으로 해야겠다!”

 

진성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민승의 말에 의외로 상혁은 잠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구체도 함께 이동했다. 별똥별이라... 창문 틈새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짝 새어 들어왔다.

 

근데 여기서도 보일까?”

글쎄요...”

 

민승의 애매한 대답을 들으며 상혁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소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하늘이었다. 그냥 본 거다. 설마 지금 내 눈앞에서 떨어지겠어?

 

반짝.

 

?”

 

거짓말처럼 밤하늘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상혁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별똥별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어? 심지어 유성우였다. 하나가 떨어지기 무섭게 또 하나가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상혁은 뒤늦게 팀원들을 불렀다. 민승과 동하가 다가왔다. 진성은 아쉽게도 게임에서나 유성을 봐야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빤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별똥별이 또 떨어졌다. 상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원 빌었어?”

 

별똥별을 보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는지 상혁이 웃으며 물었다.

 

저는... 로또 1...”

나는 다들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너는?”

 

머쓱해하며 대답하는 민승과 의외로 순수한 대답을 내놓는 동하였다. 상혁은 순간 둘의 대답이 바뀐 줄 알았다.

 

나는 내년에 우승하게 해달라고.”

 

물은 내가 바보지, 라고 동하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짧게 대답한 후 상혁은 밝아진 표정으로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상혁의 뒤에 떠있는 구체의 푸른 수정이 별처럼 빛나는 중

 

환한 별똥별 하나가 또 떨어져 내렸다.

 

 

 

 

아침이 되자 약속한 대로 경찰이 찾아왔다. 무슨 전문가들과 함께 찾아와서는 졸음에 겨운 상혁을 두고 구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잠이 깨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상혁에게 구체 컨트롤을 시켜보기도 했다. 상혁은 제 뜻대로 구체를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시한 것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숙소 내 물건들을 와장창 깨먹었다. 구체의 주인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여서 상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렇게 위험한 걸 들고 경기장에 들어간 거예요?”

그때까진 괜찮았어요. 팀원들한테도 안 그러고. 그리고 제가 가져간 게 아니라 얘가 절 따라왔어요. 못 떨궈놓으니까 데려간 거죠. 저도 경기는 해야 되는데...”

 

답답하기야 상혁이 제일 답답했다. 게임할 때도 신경 쓰이고... 스토커가 붙어도 이것보다는 덜 답답할 것이다. 사람은 물리적으로 어떻게든 떼어놓을 수나 있지 이건 떼어놓지도 못해.

 

연습시간이 되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조사는 끝났다. 이런저런 조사장비 들고 또 온댄다. 상혁은 돌아가는 경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주변에서 게임에 방해되지 않게 배려해줬는데, 이런 경우는 상혁으로선 또 처음이었다. 구속되지 않는 거에 감사해야 하나.

 

그렇게 경찰이 간 후에야 상혁은 구체와 함께 연습실로 출근할 수 있었다.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몇 게임 하지도 않았는데 금새 식사시간이 되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동안 팀원들이 상혁에게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상혁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얘는 그러니까... 기계라기보단 말 안 듣는 동물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제는 친해지다 못해 구체에 아주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진성을 보며 민승이 말했다. 이거 사람 몸무게도 버티는 것 같다며 진성이 소리쳤다. 저렇게 노는 거 보면 세상 무해한데... 상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승이 말이 맞지 뭐. 진성이가 곰이라서 동물끼리 죽이 잘 맞나보네.

 

그래도 멋있잖아요. 형 지켜주는 게. 마음을 열면 형 말을 좀더 잘 들을지도 몰라요.”

 

마음을 열란다... 민승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상혁은 할 말을 잃었다.

 

아 이거 뉴스 봤냐? 어제 떨어진 운석이 위험할지도 모른대.”

 

상혁은 호기심에 고개를 쭉 뻗어 동하의 휴대폰 화면을 봤다. 땅바닥을 움푹 패이게 만든 운석 사진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엔 작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컸구나. 운석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기체가 어딜 봐도 불길해보였다.

 

왜 픽션에서 이런 게 소재가 되잖아. 운석을 타고 온 위험한 존재.”

그래서 괜찮은 거?”

중국 당국이 아직 조사 중이래.”

 

동하가 기사내용을 설명해줬다. 이래버리면 새벽에 소원 빈 게 괜히 찜찜해지네. 참 별일이 다 있다. 여기도 별일이 있지만서도... 여전히 구체와 씨름하고 있는 진성을 돌아보며 상혁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휴대폰으로 잠시 커뮤니티에 접속해봤다. 전날의 패배는 경기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완전히 묻힌 듯했다. 이러나저러나 상혁이 욕먹고 있는 건 똑같았지만. 저를 따라온 구체가 일으킨 사고니 억울해도 하는 수 없었다. 이 구체를 내가 떨어뜨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망가진 경기장 복구비는 정말 내가 다 물어내야 하는 건가. 내년에도 저 녀석이랑 같이 경기장에 가야하는 건가.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언젠가 떨어져나가긴 하는 건가.

 

문득 사용설명서가 말해준 정해진 날이 떠올랐다. 그날이 오면 떨어져나갈지도 모르지. 문제는 그날이 언제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지만.

 

 

 

 

2018년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날까지도 구체 조사는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맨날맨날 조사에 시달리고 상혁의 곁에 언제나 붙어있는 구체를 조사하려면 당연히 상혁이 옆에 있어야 했다. 연습 중이든 일상생활 중이든 구체가 신경 거슬리게 하고, 프로게이머가 된 이래로 이 정도로 게임에 방해를 받아본 적이 드문지라 상혁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놈의 구체를 떼어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정도로.

 

정작 구체는 상혁과 상혁의 동료들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움직임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상혁으로서는 기계가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기나 할까 싶긴 했지만. 근 사흘 만에 진성은 구체에게 나한테 왔으면 더 잘해줬을 텐데, 라고 말하게 되었다. 기계한테 쓸데없이 정 주지 말라고 상혁이 충고해도 소용없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맞이하게 된 새 식구와 2019년을 보내야하는가, 새 팀원들을 맞이했을 때 나에겐 이제 밝고 희망찬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상혁이 생각하고 있을 때 의외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연습 중 사무국에서 연락을 받고 숙소로 간 상혁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만났다. 아무래도 얘 때문에 온 거 같은데... 어쩐지 껄끄러운 마음에 상혁은 저도 모르게 구체에 손을 올렸다. 구체의 진동이 느껴졌다. 세 남자는 상혁에게 명함을 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한 명은 육군 대령, 한 명은 국정원 팀장, 한 명은 대기업 연구소장이었다. 상혁은 각각과 악수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요 며칠 새 정말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난다 싶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이 구체를 떼어드릴 수 있습니다.”

 

연구소장의 말에 상혁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다만 떼어낸 후의 구체는 저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이 구체를 잘 연구해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 , 그렇군요...”

 

졸지에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기까지 하는 건가. 하긴, 얘가 정말로 충격파까지 쏜다면 엄청난 무기이긴 하겠지.

 

이걸 어떻게 떼어내요?”

 

하지만 이걸 대체 어떻게 떼어낸다는 건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아 상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태까지 경찰 조사와 전문가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저희가 직접 온 겁니다. 일단 장비들이 있는 연구소까지는 구체와 함께 동행해주셔야겠지요.”

 

국정원 팀장이 상혁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으음. 상혁은 헛기침을 했다. 사무국에서 공문 같은 것도 받았을 테니까 이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건 아닐 테고... 하지만 그래도 무섭다... 진짜라도 무서운데.

 

별일 없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그저 저희 말에만 잘 따라주시면 예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당장 리그 개막도 코앞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다. 상혁은 내년 스프링시즌 개막일을 떠올렸다. 전력으로 준비해도 모자랄 판국에 저런 공을 매달고서는... 올해처럼 이러면 안 된다. 내년에는 꼭 우승해야한다는 집착과도 같은 열망이 상혁에게 용기를 줬다. 그에게는 우승을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 그럼 언제...”

지금 바로, 저희와 함께 가주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요?”

 

그러나 지금 당장 출발한다는 말에 상혁은 당황했다.

 

, 전화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상혁은 일단 사실 확인을 위해 사무국에 전화했다. 상혁을 찾아온 세 사람의 신원은 확실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다음은 아버지였다. 사실 아버지의 답이야 뻔했다. 잘 생각해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냥, 진짜 아니다 싶으면 말려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전화한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니, 아니다. 카톡 친구목록을 쭉 살피다가 상혁은 그냥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어버렸다.

 

, 지금 갈게요.”

 

 

 

 

연구소로 가는 검은 차 안에서 상혁은 말없이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구체는 상혁의 바로 옆에 얌전히 떠있었다.

 

상혁은 이번에는 공허에 대해 찾아보고 있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공허가 의미하는 게 뭔지 상혁은 알지 못했다. 공허 챔피언이 있다는 것 정도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오리아나로 공허 챔프들 다 잡을 자신이야 있다만. 상혁은 공허에 대한 설명이 길게 쓰여 있는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주 너머에 있는 아예 다른 세상 같은 것이었다. 공허에서 나는 생명체들이 내뿜는 힘은 땅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명체들을 오염시켜 같은 공허생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한다. 고대 왕국인 이케시아가 그렇게 멸망했고, 지금 공허는 룬테라 전체를 노리고 있다. 상혁이 이해한 건 여기까지였다. 온통 보랏빛을 내뿜고 있는 공허 소속 챔피언들을 상혁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지. 멀어도 한두 시간이면 도착하겠거니 했으나 차는 정말 하염없이 달렸다. 차가 서울을 벗어나고 경기도도 벗어나 강원도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상혁은 흠칫했다.

 

연구소가 머... 네요...”

보안유지가 중요하다보니 좀 외진 곳에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구소장이 상혁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그러면 연구소 주소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국가기밀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그러나 국정원 팀장이 하는 말에 상혁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휴대폰을 든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괜히 온 거 아닐까. 상혁이 불안해하자 구체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상혁은 하지 말라는 듯 구체를 가볍게 눌렀다. 차 안에서 난리치면 우리 다 죽어.

 

차는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깊이깊이 들어가는 차에 상혁은 구체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상혁에게로 돌아갔다.

 

... 얘 소리가 이상해서요. 저번처럼 그런 일 생기면 안 되잖아요.”

 

흠칫 하는 사람들을 보며 상혁은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처럼 구체의 뒤에 숨어 휴대폰을 터치했다. 상혁의 눈이 카톡 채팅방 목록을 재빨리 훑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사람이... 차는 굽이굽이 산을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건물이 보였다. 연구소가 아닌데? 공장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입구 쪽에 공장이라고 써있는 게 보였다. 심지어 공장이름조차 명함에 나와있던 부서나 기업명과도 전혀 거리가 먼 이름이었다.

 

상혁은 재빨리 카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시간이 없어서 공장 이름만 찍어 보낸 후 숫자가 사라지기 무섭게 보낸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차에 탄 사람들 모르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기밀유지를 위해 평범한 공장으로 위장한 겁니다. 내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죠.”

 

연구소장이 예의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는 이내 공장에 도착해 멈춰 섰다. 상혁은 구체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거의 세 시간은 달린 거 같은데... 공장, 아니, 연구소의 겉모습은 분명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얼핏 보면 폐공장으로 보일 정도로. 엄청... 수상해.

 

일이 이렇게 되니 상혁은 오히려 곁에 떠있는 구체가 저를 지켜줬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떼어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쉽게 못 떼어내지 않을까. 아니, 얘를 떼어내러 온 건데 이게 무슨... 그러면서 상혁은 지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으로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편 자신의 아지트에서 노닥거리며 게임이나 하고 있던 준식은 의문의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보낸 사람은 상혁이었고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는 카톡을 잘 하지 않았다. 메시지에는 처음 들어보는 회사 이름이 적혀있었다. 뭐냐고 바로 물어봤지만 상혁에게 더 이상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준식은 상혁이 보내온 회사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바로 지도 정보가 떴다. 뭐야. 무슨 강원도 산골짜기 한가운데에 회사가 있어? 그리고 이걸 왜 상혁이가...? 준식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세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상혁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연습시간이어서 그런지 답이 오질 않았다. 기다리다가 준식은 게임에 접속해서 재차 물어봤다. 혹 떼러 갔단다. 무슨 말인지 준식도 바로 알아들었다. 이어 상혁이 숙소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니 준식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따라간 상혁, 그리고 상혁으로부터 온 알 수 없는 메시지...

 

잠시 고민한 끝에 준식은 결국 차키를 들고 일어났다.

 

 

 

 

말한 대로 연구소 안은 겉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깨끗하며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까지 분주히 돌아다니니 마치 규모 있는 병원 같았다. 연구소... 맞구나. 상혁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긴장 풀린 상혁의 표정에 연구소장은 미소 지었다.

 

안내에 따라 상혁과 구체는 실험실로 들어갔다. 방이 하도 많아서 정확히 어떤 실험실인지 상혁은 알지 못했다. 실험실에 들어가기 전 협조서류에 서명하고 휴대폰도 반납해야만 했다. 경기 중인 것도 아닌데 휴대폰이 몸에서 떨어지자 상혁은 다시 불안해졌다. 아까 카톡 메시지 삭제하길 잘한 거 같다.

 

실험실에는 스피커와 상자가 놓여있는 탁자, 의자 하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도 하나 없이 사방에 금속벽만 존재할 뿐이었다. 상혁의 눈앞에서 구체는 금속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상혁과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금속상자에 들어가 밀봉되기까지 구체는 얌전했다. 오히려 상혁이 조마조마해졌다. 정말 괜찮은 건가. 상자에 전선까지 연결한 후 연구원들이 모두 나가고, 새하얀 연구실에는 상혁과 금속상자 둘만 남았다. 일정 거리 이상 물러나라는 경고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상혁은 뒤로 물러났다. ... 너무 멀리 떨어지는 거 같은데...

 

아니나다를까 구체가 쾅쾅 금속상자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단박에 찌그러지는 상자를 보며 상혁을 비롯, 지켜보던 모두 놀랐다.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연구원의 말에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말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거야. 알았지?”

 

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체는 상혁의 말을 듣자 움직임을 멈췄다. 연구원들이 연구실로 들어왔고 구체를 둘러싼 상자는 새로운 상자로 바뀌었다. 이어 상자에 전선들이 다시 이어졌다. 상혁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체가 들어간 상자와 마주보고 앉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컴퓨터로 분석 같은 걸 하는 모양이었다. 상혁도 구체의 AI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족히 몇 시간은 지났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으니 상혁은 슬슬 졸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자니 연구원 몇 명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이상혁 씨, 피 좀 뽑을게요.”

 

갑작스러운 채혈 통보에 상혁은 깜짝 놀랐다.

 

? 왜 저한테...?”

구체가 왜 이상혁 씨만 따라가는지도 분석하기 위함입니다. 걱정 마세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혁은 선뜻 팔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 상혁의 눈에 이미 약물로 가득 차있는 주사기가 보였다. 저건... 뭐지? 의아해하는 사이 연구원들이 상혁의 팔을 붙들었다.

 

, 뭐하세요!”

 

화들짝 놀란 상혁은 팔을 빼며 목소리를 높였다.

 

죄송합니다. 팔 고정시킬만한 게 없으니까 좀 붙들겠습니다.”

저 피 뽑는다고 아직 말 안 했는데요?”

 

약물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계속 힐끔거리며 상혁은 딱딱하게 말했다. 상혁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어쩐 건지 연구원은 채혈을 준비하면서 그 주사기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상혁이 생각보다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연구원들은 난감해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채혈에 대해 상혁에게 설명했다. 상혁도 진즉에 이해는 다 했다. 그저 좀 느낌이 안 좋아서 망설일 뿐이었다.

 

협조한다고 약속하셨죠? 서류에도 이상혁 씨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저희는 정말로 채혈만 할 겁니다.”

 

기나긴 설득 끝에 상혁은 결국 옷소매를 걷고 팔을 내밀었다. 익숙한 고무줄이 상혁의 팔을 조였고 채혈용 주사바늘이 찔러 들어왔다. 상혁은 채혈주사기에 자신의 피가 차오르는 것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빨리 끝나라...

 

상혁의 체감과 달리 채혈은 금방 끝났다. 그러나, 연구원들이 팔을 놓지 않았다. 채혈주사를 내려놓은 연구원이 이어 투명한 액체가 든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상혁이 봤던 그 주사기였다. 본능적으로 팔을 빼려 했으나 붙들고 있는 연구원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느낌이 이상하면 믿어야한다니까! 상혁은 온힘을 다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진정제니까 진정하세요! 뭐해 꽉 잡아!”

 

씨발 진정제는 개뿔! 연구원 둘이 더 달려들어 상혁의 몸을 눌렀다. 연구실 문을 확 열고 검은 정장을 입은 보안요원들도 뛰어 들어왔다. 입이 막혀 소리도 못 지르고 있는 상혁은 자연히 상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말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거야. 알았지?

 

내가 미쳤지! 다가오는 주사기를 보며 상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게 진짜 진정제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니 애초에 나한테 진정제 따위를 왜 놓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아 난 그냥 우승이 더 하고 싶었을 뿐인데! 비록 끝없더라도, 사람들한테 보란 듯이 계속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때 쾅 하고 금속끼리 충돌하는 요란한 소리가 상혁의 귀를 때렸다. 주마등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상혁은 기겁하며 눈을 떴다.

 

금속상자를 부수고 나온 구체가 주사기를 들고 있는 연구원을 날려버렸다. 경기장에서 봤던 것처럼 연구원은 가볍게 날아가 연구실 벽에 부딪쳤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연구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연구실 밖으로 달아났다. 상혁의 몸이 자유로워진 가운데, 보안요원들은 총까지 꺼내들었다. 그러나 총을 쏘기도 전에 구체가 재빨리 날아가 보안요원들을 쓸어버렸다. 마치 볼링핀을 싹 쓸어버리는 볼링공 같았다.

 

널브러진 채 신음하는 사람들이 상혁의 주변에 깔리고, 구체는 상혁에게로 다가와 주변을 맴돌았다. 형편없이 부서진 금속상자와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던 상혁은 구체의 윙윙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고마워...”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혁은 구체를 쓰다듬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지? 답이야 정해져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상혁은 숨을 크게 토해내고는 연구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구체가 저를 지켜줄 것이라 굳게 믿으며.

 

보안요원들이 상혁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구소 전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상혁 씨, 우리는 정말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요. 우리는 단지 그 구체의 비밀을 밝히고 그 기술력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거짓말. 상혁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직감했다. 맞아. 이 사람들은 구체가 필요한 거지 내가 필요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구체를 연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구체가 나만 따라다니니까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겠어.

 

...근데 이게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일이냐. 무슨 길 가던 사람 잡아가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도 아니고! 누가 체력 바닥인 프로게이머 아니랄까봐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앞뒤로 구체가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퍽퍽 쳐서 날려버리고, 사이렌은 귀청 떨어지게 울려대지, 상혁은 픽션에서나 나올 법한 대탈출극을 벌이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근데 진짜 힘들어! 힘들다고!

 

악을 써서 달려 어떻게 건물 밖으로는 나왔으나 상혁은 정말 더 이상은 달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밖은 이미 깜깜했다. 여기 산속이라서 산까지 내려가야 돼. 심지어 인적 드문 곳이라서 어떻게 산을 내려간다고 해도 도움 청할 사람 만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 솔직히 구체가 너무 철벽방어를 하고 있어서 걸어가더라도 무사히 산을 내려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보안요원의 절반 이상은 구체가 쓸어버린 것 같다. 문제는 역시 자신의 체력이 아닐까, 준식이가 운동하자고 할 때 같이 할 걸, 이제와 후회하는 상혁이었다. 심지어 피까지 뽑았으니 체력이 얼마 없는 것도 당연했다.

 

남은 보안요원들은 계속 쫓아왔고 구체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상혁의 주변을 돌다가 그들을 넘어뜨리고 날려보냈다. 차량으로 이동하려고 하니 구체는 바로 차량의 바퀴며 엔진을 덮고 있는 보닛을 콱 찍어 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구체에게 뒤를 맡기고 상혁은 차가 올라왔던 길을 통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라 내리막길이 지옥이었다. 그리 가파르지도 않건만 상혁은 몇 번이고 넘어지고 뒹굴었다. 요 몇 년 동안 나름 쥐면 부서질라 불면 날아갈라 대접 받았던지라 하루아침에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할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상혁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를 악물고 산을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힘든 와중에도 깜깜한 산이 무서웠다. 넘어지는 데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구체가 상혁이 넘어지지 않도록 종종 도와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산길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져 점점 걷기가 어려워졌다. 상혁이 억지로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주저앉는 순간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으앗!”

 

결국 상혁은 또 넘어졌다. 아마 다리며 팔이며 상처가 잔뜩 났을 거라고 상혁은 생각했다. 못 일어나겠어. 이번에는 아예 발목을 접질러버렸다. 일어나려고 하니 발목이 마구 쑤셔왔다. 상혁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에 뻗은 어두운 길이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뒤쪽에서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구체는 상혁의 주위를 돌았다. 상혁은 울음을 삼켰다. 누가 좀 구해줘...

 

그때 멀리서 빛이 보였다. 상혁의 눈이 커졌다. 누가 여길 온다고? 여길?

 

차의 헤드라이트였다. 차는 상혁의 앞에서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상혁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가 뛰어내렸다.

 

상혁아!”

 

 

 

 

야이 미친, 뭘 믿고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냐고! 애도 아니고!”

 

뒷좌석에 상혁을 태우고 준식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상혁의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경찰에 신고할까 했는데 안 하고 달려오길 잘한 거 같다. 준식은 흘끔 백미러를 봤다. 구체의 커다란 덩치가 백미러의 절반가량을 가렸다. 그리고 상혁은 그야말로 세상 불쌍하게 축 늘어져있었다. 상혁으로서는 한 달 활동량을 몇 시간 만에 다 채운 셈이었다. 내 차에 이상혁이 타는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낯선 사람 그렇게 경계하면서 왜...”

나라에서 얘 떼준다고 하는데 그럼 가야지.”

 

상혁이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 준식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구체가 어지간히 연습에 방해된 모양이다. 스프링 개막도 코앞이니 상혁이 성격상 미칠 노릇이었겠지. 저 공새끼, 알아서 눈치 좀 잘 살피지.

 

이제부터가 문젠데... 너 또 잡아갈까봐 걱정된다.”

나도 모르겠어. 진짜 얘 때문에...”

 

구체를 보는 상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보면 얘가 없었으면 내가 이런 일 겪을 필요도 없었잖아. 울컥한 상혁은 구체를 퍽 내리쳤다. 물론 구체는 미동도 없고 제 손만 아팠다. 때린 것이 무색하게 상혁은 이내 구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사용설명서 들어보니까 정해진 날에 버튼을 누르라는데, 그러면 얘가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싶어.”

정해진 날이 언젠데?”

근데 그걸 몰라. 십년 후일 수도 있고 나 죽기 직전일 수도 있고.”

그렇게 먼 날이면 지금 나타날 이유가 있나? 난 오히려 가까운 날일 거 같은데.”

 

준식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뭘 알려줄 거면 좀 제대로 알려주지. 상혁은 구체에 새기진 오리아나 레벡의 이름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난 건지...

 

그때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용설명서에 접속했을 때와 똑같았다. 상혁은 기겁하며 손을 뗐다. 덩달아 놀란 준식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잠깐, 잠깐만... 이거 사용설명서 말고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아!”

 

다급히 말하며 상혁은 오리아나의 이름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까 뭘 어떻게 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상혁은 곧 O부터 k까지 손끝으로 슥 훑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R 이었나. 손끝은 오른쪽으로 이동해 R로 갔다. 그다음에 다시 k...

 

눈앞이 다시 깜깜해졌다. 그리고 노이즈와 함께 사용설명서를 읽어주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는 오리아나 레벡입니다. ]

 

 

 

 

[ 저는 오리아나 레벡입니다. 당신이 이 마지막 메시지를 듣고 있다면 아마 모든 것이 끝난 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손에 의해 저의 행성정화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였기를 바랍니다.

 

(노이즈)

 

...운석이 불러온 그 재앙을 우리는 공허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그렇게 재앙은 시작되었습니다. 공허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다가온 2019년에 세상은 거짓말처럼 지옥이 되었죠. 전세계가 눈 깜짝할 사이에 공허로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공허에 죽어가거나 공허생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멸망했습니다.

 

(노이즈)

 

...3018년 지금까지 이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저뿐이군요. 저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마지막 희망을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당신이 부디 제때 버튼을 눌러 인류를 구원하였길 바랍니다.

 

(노이즈) ]

 

그렇게 메시지는 끝이 났다. 상혁은 제가 들은 내용이 믿기지가 않아 메시지를 재차 다시 들었다. 준식은 구체를 옆으로 치운 상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며 덩달아 불안해졌다.

 

상혁아... 왜 그래...?”

지금.. 지금 몇 시지? 아니 오늘 며칠이지?”

지금 1135. 오늘 1230.”

“2018년이 가기 전에...”

 

마지막 메시지로 유추해보건데 며칠 전 중국에 떨어진 운석이 재앙의 시작인 것이었다. 그리고 2018년의 마지막 날부터 운석에 묻어온 공허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이 구체, 게임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었어. 인류가 멸망한 미래에서 온 존재였던 거야.

 

저 차 아까부터 따라오는데.”

 

준식이 사이드미러를 힐끔 보며 중얼거렸다. 상혁도 뒤돌아봤다. 검은색 SUV 한 대가 바짝 뒤쫓고 있었다. 분명 상혁이 연구소까지 타고 갔던 그 차종이었다.

 

그 사람들이야!”

아 미친! 야 안전벨트 매!”

 

상혁에게 소리치며 준식은 엑셀러레이터를 확 밟았다. 급히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상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쫓아오는 검은 차도 따라서 속도를 높였다. 준식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상혁 때문에 살다살다 차 추격전을 다해보고! 오늘 이걸로 내 업보는 다 갚는다!

 

어떻게든 따라오는 차를 따돌리기 위해 준식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샛길로 차를 돌려버렸다. 자연히 코너링이 거칠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무슨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핸들을 꺾을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났다. 상혁은 목숨 걸고 손잡이를 잡았다.

 

이대론 안 되겠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준식이 소리쳤다. 상혁은 몸이 앞으로 확 쏠리는 것을 겨우 버텨냈다.

 

이상혁, 구체 내보내!”

 

준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혁은 바로 알았다. 차 문을 열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상혁의 드러난 피부를 할퀴었다. 상혁은 구체를 밖으로 던진 후 바로 차문을 닫았다. 준식은 온힘을 다해 엑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았고 차는 구체를 놔둔 채 급발진했다.

 

준식의 차는 바로 출발했고 구체는 뒤따라오는 검은 차를 향해 날아갔다. 검은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다가오는 구체를 보고 저희들에게 무슨 재앙이 일어날지 바로 예감했다. 그건 폭탄이나 미사일이 날아오는 거나 다름없었다.

 

차 세워!”

 

그러나 무슨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구체가 부딪쳤다. 순식간에 앞유리가 깨졌고, 에어백이 터졌다. 이어 충격파가 차를 덮쳤다. 자동차 엔진이 펑 터지고 차가 더 이상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바퀴가 휙 돌아간 차는 결국 근처에 있는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차량이 더 크게 폭발할 수도 있기에 차에 탄 사람들은 온힘을 다해 차에서 탈출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차안에서 상혁은 계속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언제쯤 구체가 돌아올까.

 

지금 몇 시야?”

“1152.”

 

31일이 되기 전에 와야 할 텐데. 상혁이 빨리 돌아오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멀리서 구체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배준식 차 세워!”

 

차가 멈췄다. 상혁은 차에서 급히 뛰어내렸고 준식도 따라내렸다. 아픈 발목을 이끌고 달려간 상혁이 날아오는 구체를 향해 팔을 뻗자 구체는 바로 품안에 부드럽게 안겼다. 사람에게 하듯 상혁은 구체를 다독였다.

 

아직 늦진 않았겠지.”

 

구체의 푸른 수정을 내려다보고 중얼거리며 상혁은 구체를 안은 채로 버튼에 손을 올렸다. 버튼은 수정의 뒤쪽에 있었다.

 

달칵, 하고 버튼 눌리는 소리와 함께 기계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상혁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제 몸에서 손을 통해 무언가가 흘러들어가는. 이건 태엽... 소리? 상혁은 살며시 구체를 놓아줬다. 바로 손을 내려다봤으나 손은 멀쩡했다.

 

상혁에게서 떨어진 구체의 푸른 수정이 하늘 위로 향했다. 수정이 눈부시게 빛나며 밤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강해지는 빛에 상혁과 준식은 뒤로 물러나며 팔로 눈을 가렸다.

 

하얀 빛이 구체 전체를 가리웠다. 그리고 곧 선연한 빛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상혁과 준식의 눈은 저절로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빛줄기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상혁아... 저기...”

 

준식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말하지 않아도 상혁 역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이틀 전 새벽에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빛줄기들이 밤하늘 전체에서 쏟아져 내렸다. 얼핏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별똥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말 그대로 빛의 비였다. 하늘 일부분에서 내리던 그것은 빠르게 준식과 상혁의 시야를 넘어서서 온 하늘을 뒤덮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곧 지구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고 상혁은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빛이 그렇게 온 세상을, 그리고 모든 인간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와 진짜... 말도 안 돼...”

“......”

상혁아, 난 이 풍경 평생 못 잊을 거 같아.”

 

준식의 목소리에 경의가 담겨 있었다. 하얀 빛줄기 사이로 보이는 끝 모를 어둠. 검은 어둠을 가르는 하얀 빛들. 이것을 위해 구체는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상혁을 찾아온 것이다. 상혁도 이 기적 같은 풍경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만보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그래서 상혁은 겨우, 단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늦지... 않은 것 같아요, 오리아나.”

 

 

 

 

1231, 그렇게 상혁의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물론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 망할 연구소와 국정원, 그리고 군에서까지 상혁을 아주 잡아먹으려고 들 것이었다. 집단의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 상혁은 알았다. 진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거야말로 기나긴 싸움이 되겠구나 상혁은 예상할 수 있었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평화롭진 않지만 평화로웠다. 전날의 유성우와 함께 중국에 떨어진 운석이 평범한 돌덩어리가 된 것 같다고 동하가 알려줬다. 더 이상 보랏빛 기체를 뿜어내지 않는단다. 김동하 대체 왜 아쉬운 표정인 건데. 상혁은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이 다 끝나고 보니 겨우 이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이 세상을 구한 게 맞기는 한가 싶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기엔, 상혁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내년에도 그는 욕을 먹을 것이다. 인류를 구하면 뭐하나 나 자신은 못 구한 거 같은데. 밝고 희망찬 나의 2019년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2019년은 오지도 않았건만, 상혁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가버린 듯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년에는 무조건 롤드컵 우승을 해야 한다고 상혁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상혁은 구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약 한 시간 가량 빛을 쏟아낸 구체는 빛이 꺼지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수정도 빛이 바랬다. 구체는 허공에 떠오르지 않았다. 상혁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금속의 무언가로 차가운 땅 위를 뒹굴 뿐이었다. 상혁은 어둠에 파묻힌 구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으로 구체를 붙잡았다. 그렇게 저를 고생시킨 존재임에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깊은 밤, 상혁은 제 임무를 다하고 정지한 구체를 눈시울 붉어진 눈으로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그 구체는 지금 연구소에 가있다. 그냥 놔뒀으니까 아마 가져갔겠지. 아직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면. 하지만 이제 와서 구체를 연구해봤자 얻는 게 없을 것이라고 상혁은 예상했다. 그건 이제 그냥 빈 깡통일 뿐이야.

 

연구소를 떠올리니 자연히 저를 구하러왔던 준식도 떠올랐다. 기적처럼 준식이 나타났을 때 육 년 우정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준식이는 지금쯤 해외 나갈 짐이나 싸고 있겠지. 나가기 전에 고맙다고 말은 해야 할 텐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귀신 같이 준식에게서 게임 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너 이제 출국금지 당할 거라며 상혁은 준식을 겁줬다. 준식은 ㅋㅋ거리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정말... 아무도 모르지. 여튼 이런 일 끼어들어줘서 고마워 배준식.

 

“2018년 마지막 날에도 변함이 없네요. 저희는.”

 

연습하던 중 민승이 문득 말했다. 이런 날도 게임과 함께 보내니 그리 말할 만도 했다. 상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1158. 곧 있으면 2019년이네.

 

때로는 변함없는 게 좋은 걸 수도 있어.”

 

상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물론 우리는 내년에 좀더 많이 발전해야겠지만 말이야. 진성이 상혁의 말이 멋있다며 치켜세워줬다. 1159.

 

그리고, 12시가 되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상혁이 가장 먼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들 해피 뉴이어.”

 

 

  





 

3018, 오리아나 레벡은 들고 있던 구체를 보랏빛 땅바닥에 가만히 내려놨다. 구체를 내려놓기 위해 굽힌 등에서 거대한 태엽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스스로 감아놓은 태엽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오리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리아나는 오염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잠시 돌아봤다. 폐허가 된 도시 전체에 보랏빛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건물의 잔해도 땅도 하늘도, 모두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멀리서 공허생물이 기괴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도, 다른 동물도,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 남은 인간은 오리아나 하나뿐이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도 인간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오리아나는 구체의 푸른 수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불었고 공허에 오염된 공기가 오리아나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이 아닌 기계몸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네가 마지막 구체구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오리아나는 말했다. 구체는 몸을 뒤집어 푸른 수정을 하늘 위로 오게 했다. 오리아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구체들을 만들어 과거로 보냈고 이 구체가 마지막 구체였다. 구체의 코어를 이루는 에너지 수정을 이제 더이상 구할 수가 없었다.

 

공허항체를 가진 인간을 꼭 찾아내줘.”

 

구체가 대답할 리 없지만 오리아나는 부탁했다. 공허항체를 가지고 있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 좋은 사람일 거야.

 

수많은 시공간을 넘고 넘어서, 찾아낼 거라고 믿어.”

 

정말 기나긴 시간이었다. 오리아나는 이 땅에서 살아왔던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고 최후의 인간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모든 인간들을 잡아먹은 공허는 그러나 오리아나만큼은 죽이지 못했다. 오리아나는 스스로 태엽을 감으며 텅 빈 세상에서 계속 살아나갔다. 존재하지 않는 인류를 위해.

 

곧 눈부신 빛이 구체를 감쌌다. 이윽고 오리아나의 손 안에 있던 구체는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

 

오리아나는 구체가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태엽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오리아나는 알았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태엽을 되감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으니까.

 

이윽고 태엽이 완전히 멈췄다. 무릎 꿇고 앉아 바닥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오리아나도 작동을 정지했다. 멈춰버린 기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편안해보였다.

 

 

 

 

the end

 

 

 

 


Posted by G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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